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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마을

호놀룰루 항구_오아후, 하와이

by 재미감자 2026. 1. 28.

'호놀룰루 항구(Honolulu Harbor)'는 하와이, 오아후섬에 위치한 주요 항구 중 하나입니다. 역사적으로 물류와 사람들의 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고요. 1902년 제물포항을 출발한 최초의 조선인 이민자 121명이 도착한 곳도 여깁니다. 

물이 맑죠? 사람들이 다가가면 먹을 것을 던져주니,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조건 반사처럼, 열대어들이 모입니다.

 
이 항구의 9번 부두(pier 9)에 ‘알로하 타워’가 있습니다. 완공 당시 하와이에 들어오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배로 입항했고, 항구에 들어오는 순간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이 탑이었다고 하지요. '호놀룰루 항구'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1926년 9월 11일에 완공되었습니다. 낯선 곳에 오는 모든 이들에게 ‘ALOHA’, 괜찮다고, 낯선 곳이지만 괜찮다고, 조국을 떠나 이국땅에 온 당신들.. 다 괜찮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시계탑에 ALOHA, 보이시쥬?

 
현재 '알로하 타워'의 시계탑과 항구 건물 주변은 '알로하 타워 마켓플레이스(Aloha Tower Marketplace)'로 변모했고, 관광객들과 현지인들로 북적이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마켓플레이스의 일부 건물을 '하와이 퍼시픽 대학(Hawaii Pacific University)'에서 학생 기숙사, 강의실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항구의 7번 부두(pier 7)에서 인천-호놀룰루 우정 기념 비석을 발견합니다. 

 
1902년 12월 22일 대한민국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한 121명의 이민 선조들이 1903년 1월 13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항 7번 부두에 처음 도착하면서 120년의 한인이민역사가 시작되었다. 선조들이 개척한 이민역사와 숭고한 애국심을 기억하기 위해 인천광역시에서 표지석을 설치한다.
 

2024년 1월 13일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장 유 정 복

 
비석에 이렇게 한글로 써 있는데, 항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던 상태에서 방문했고, 그리고, 이런 비석을 보았을 때 묘한 감정.. 이 생겨 조금 울컥했습니다. 120년 전 우리나라, 당시 우리 선조들의 삶.. 그리고 21세기의 나.. 이민 역사 120년을 기념하며 둔 표지석의 존재..
 
요즘, 최태성 선생님의 ‘다시, 역사의 쓸모’를 읽고 있는데, 마침 하와이 이주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있어 그 부분 발췌하여 적어봅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볼게요. 떠오르는 이야기가 무척 많지만 그중에서도 하와이 이주 노동자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음악 영화 ‘하와이 연가’를 보고 미지의 땅 하와이로 향한 사람들의 삶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그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근현대라는 역사의 길목에 들어서게 되더군요.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이민이 시작된 때는 1902년이었습니다. 1800년대 후반에도 만주와 연해주로 떠난 사람이 많았지만, 합법적인 이주는 아니었어요. 먹고살 길이 없으니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몰래 떠났던 거였지요. 하지만 1902년에 시작된 이민은 그 성격이 달랐습니다. 정부 주도하에 이뤄졌으니까요. 
 
대한제국은 당시 주한 미국 공사인 알렌의 소개로 하와이 사탕수수재배자협회 회장인 비숍과 이민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하와이에서 일할 노동자를 모집했어요. 그때 전 세계적으로 설탕 수요가 폭증했거든요. 사탕수수 농장이 활황을 맞았는데 일할 사람이 부족했던 거죠. 
 
당시에 한인 노동자를 모집하는 광고 내용을 보면 누구나 혹했을 것 같아요. 하와이는 1년 내내 따뜻한 나라인 데다 일거리가 많다는 거예요. 교육도 무료로 받을 수 있대요. 하와이에 대한 환상이 얼마나 컸던지 심지어 나무에 돈이 열린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이주는 1905년까지 계속됐습니다. 주로 제물포, 그러니까 지금의 인천 사람들이 많이 이주했습니다. 굶주림 없는 삶을 꿈꾸며 떠났지만, 그들을 기다린 것은 불볕더위와 끝없는 노통이었어요. 말이 통하지 않고,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습니다. 인종 차별도 심했어요. 힘없는 나라의 국민은 어디에서나 서러웠습니다. 1910년에는 나라마저 사라졌어요. 대한제국이 일제의 침탈로 국권을 상실한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끊임없이 저항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독립 선언을 시작으로 한반도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항일독립운동이 일어났고, 상하이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임시정부에 당장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돈이었지요. 어떤 단체든 자금이 있어야 운영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발행한 것이 독립공채입니다. 일종의 채권이었죠. 채권은 정부나 공공단체 혹은 주식회사가 발행하는 차용증서입니다. 채권을 팔아서 자금을 조달한 다음, 정해진 기한 내에 이자를 더해서 갚는 겁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야심차게 독립공채를 발행했지만 외국인들은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언제 독립할지 기약할 수도 없는 나라의 채권인데 누군가가 찾아와서 “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이 일원이오. 훗날 나라를 되찾으면 반드시 돈을 돌려주겠소”하며 권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상식적으로 누가 이런 채권을 사겠어요? 경제학에서 말하는 불량 채권이 바로 이런 거겠죠. 회수가 어렵잖아요. 그런데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납니다. 이 독립공채가 매수되기 시작한 거예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이주 노동자들이 기꺼이 독립공채를 구매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주 노동자들은 일요일을 제외하고 하루 10시간씩 노동했다고 합니다. 그때 받은 월급이 평균 17달러 정도였대요. 온종일 뙤약볕에서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을 독립공채 사는 데에 쓴 것입니다. 하와이를 비롯한 미주 지역의 한인 숫자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1만 명이 될까 말까 했어요. 그런데 독립 자금은 거의 다 이 지역에서 나왔어요.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 건물도 안창호가 미주 지역에서 모아 온 독립 자금으로 빌린 것입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을 만나고 오는 길에 죽고 싶다고 적었습니다. 그만큼 고마운 마음이 컸던 거예요.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 소식을 들은 이곳 한인들이 독립운동 기금을 처음 모집한 이후 1920년까지 하와이에서만 모인 독립 자금의 규모는 300만 달러 수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와이 이주 노동자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머나먼 타국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리는 그들이 당장 고국을 위해 총이나 폭탄을 들 수는 없었어요. 정부에 들어가 일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모은 돈을 독립 자금에 보태는 것, 그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나는 이것밖에 못 해’, ‘내가 무슨 큰일을 하겠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런 작은 마음이 모이고 모여서 시대정신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역사가 되었고요. 
 
대단한 역사적 사건에 이름을 남긴 사람에 비해 나의 힘과 역할은 얼핏 별 볼 일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이 작은 일이 역사의 발전 방향에 부합한다면 시대정신의 한 조각을 쥐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 지나간 역사를 기억하고, 앞으로 다가올 역사에 관심을 가진다면 나의 옆 사람, 또 그 옆 사람에게 분명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사실. 하나는 작아 보이지만 그것들이 모이면 역사를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 된다는 사실. 이는 제가 역사를 공부할 때마다 확인하는 진실들입니다. (최태성, 2024, 25~28쪽)

하와이에서 가장 오래된 선박인 'Falls of Clyde', 1878년 스코틀랜드에서 건조된 대형 범선으로 설탕 등의 화물을 운송하는데 쓰였습니다. 미국 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현재 '알로하 타워' 근처에 정박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