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천사님과 1박 2일 동안 서울을 여행하기로 한 당일 아침, 비가 오니 마음이 동하여 창틀 청소를 시작했다. 베란다 쪽 방충망을 열려고 하는데 잘 열리지 않아 힘을 주어 미는 순간, 방충망이 창틀을 벗어났다. 청소를 시작하자마자 사고가 나다니! 이걸 맞춰 끼우겠다고 한여름에 낑낑대며 1시간 동안 씨름하니 얼굴에서 땀이 뚝뚝 쏟아진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아침밥을 먹는데, 유튜브에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는 영상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거다. 그래서 ‘방충망 끼우기’로 영상을 찾아보았는데...... 오, 하나님! 방충망에 관련된 영상이 수십 개나 있다. 영상 3개를 보았다. 해결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올라왔다.
“아자자자, 나는 방충망을 끼울 수 있다.”
영상에서 본 대로 일단 창틀에 올라섰다. 양손으로 방충망의 한쪽 끝을 잡아, 뒤로 죽죽 밀고 난 후 위쪽 창틀에 방충망을 끼우고, 아래쪽 창틀에 방충망을 맞추니 방충망 끼우기 성공! ‘YEAH, YEAH, YEAH’ 역시 나란 여자는!!! 그러나 삼 일이 지난 오늘까지 어깨와 팔이 심하게 쑤신다.

방충망도 끼웠으니 이제는 서울로 가자. 수호천사님과는 숙소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숙소까지 버스로 갈까, 지하철로 갈까에 대하여 제법 심각하게 고민을 하다가 밖에는 여전히 제법 많은 양의 비가 내리고 있으니 비를 조금이라도 덜 맞도록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했다.
- 경로: 서현역 -> 왕십리역 -> 청량리역 -> 돌곶이역
- 예상시간: 약 1시간 30분
청량리역에 도착하여 돌곶이역으로 가던 중에 수호천사님이 숙소에 도착했다는 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화성에서 사는 수호천사님이 성남에서 사는 나보다 더 일찍 도착했다. 멀리 사는 사람이 먼저 도착한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인가? 돌곶이역에 도착한 후 안내받은 대로 길을 따라 쭈욱 걸어오니 어려움 없이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숙소가 있는 이곳 장위동 일대는 부동산 시장이 호황이던 2006년에 서울특별시 3기 뉴타운 사업 지역으로 지정되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업을 취소하거나 속도를 늦춘 구역들이 늘어났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숙소 주변에 빈 상가도 제법 있고, 노후한 주택들도 많이 보였다.

숙소의 구조는 현재 내가 사는 아파트와 비슷했다. 큰 방이 한 개, 작은 방이 2개, 부엌과 거실이 붙어있고 화장실이 1개! 작은 방 2개 중 한 개는 침실로, 다른 한 개는 다이닝룸으로 꾸며 놓았다. 퀸사이즈 침대가 있는 침실을 내가, 싱글 사이즈 침대가 있는 침실을 수호천사님이 사용하기로 하였다. 나이가 드니 친구와 여행할 때 이제는 침실을 따로 써야 좋다. 방을 따로 쓰기 위하여 에어비앤비에서 집을 구했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예약한 숙소가 잡지 사진 촬영지로 많이 사용된다더니 가구나 소품 등도 실용적이면서 아주 멋스러웠다.

이른 저녁을 먹고 <충무아트센터>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둘의 의견이 일치! 수호천사님의 초밥집 리스트 2개 중에서 지하철역 근처 <오성초밥>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오고 있으니 찾아가기 조금 더 쉬운 곳에 있었던 <오성초밥>을 선택! ‘오늘의 스시’(16,000원)를 주문해서 맛있게 먹고 있는데 모밀 소바가 서비스로 나왔다. 얼음보숭이 이불을 덮고 있는 소바가 시원하고 맛있었다. 든든하게 먹고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으로 Go Go!

뮤지컬 시작 1시간 30분이나 전에 도착했는데도 공연을 보기 위해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이런 부지런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킹키부츠’ 포스터 앞에서 사진도 찍고, 예약해 둔 오페라글라스도 대여하고, 티켓도 수령하고, 차도 마시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여유 있게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상영 시간이 되었다. 다음에도 뮤지컬을 관람할 일이 있다면 한 시간 전에는 극장에 도착해야 할 것 같다.
이날의 캐스팅은 찰리 이석훈, 롤라 강홍석, 로렌 김지우, 돈 심재현이다. 공연이 끝나고 musical kinky boots를 검색어로 하여 유튜브에서 같은 장면을 찾아 비교해보았다.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한 킹키부츠가 훨~~~~~~~~~~~신 재미있었다. 내가 브로드웨이 kinky boots를 보기 전이니 이렇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음을 고지한다.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제일 위험하다’고 했다. 나는 아직 킹키부츠에 대한 책을 한 권만 읽은 상태이다.
아래는 킹키부츠에 나오는 메인 캐릭터들에 대한 요약이다.
1. 찰리: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다. 찰리의 꿈은 대도시 런던에서 사는 것.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노쓰햄튼에 있는 아버지의 구두 공장을 물려받아 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한다. 공장은 오래전에 재정적인 위험에 처해있었던 상태! 찰리는 드래그 퀸을 위한 남성용 부츠를 만들어 구두 공장을 살리기로 마음먹는다. 심경의 변화가 드라마틱하다. 찰리의 무의식은 런던이 아니라 아버지와 구두 공장에 있었던가?

2. 롤라: 권투선수 아버지 아래서 권투선수로 자랐다. 그러나 그의 성 정체성은 드레그 퀸. 아버지는 이런 롤라를 이해하지 못한다. 롤라는 아버지와 불화를 겪고, 권투선수로서의 커리어를 접는다. 그리고 쇼걸로 살아간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세상과 당당히 맞짱뜨는 롤라. 여장을 하면 그는 어떤 남자도 무릎 꿇게 만들 수 있다. 롤라의 재능을 알아본 찰리에게 스카우트되어 노쓰햄튼의 구두 공장에서 디자이너로 일한다.
3. 로렌: 찰리에게 공장을 살리기 위한 아이디어로 틈새시장 공략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그녀의 아이디어는 특별한 남성인 드레그 퀸을 위한 부츠를 제작하는 것! 이 아이디어로 로렌은 직원에서 매니저로 승진한다. 찰리가 니꼴라와 헤어진 후 찰리와 연애를 시작한다.
4. 돈: 보수적이며 마쵸기질의 돈은 여장 남자인 롤라가 못마땅하다. 둘의 갈등은 점점 심해진다. 돈은 롤라를 공장에서 내쫓기 위해 권투 시합을 제안한다. 돈이 이긴다. 그런데...... 시합이 끝난 후 돈이 롤라에게 시합에서 일부러 진 이유를 묻는다. 롤라가 대답한다. “네가 다음 날 공장에 출근했는데 쪽팔릴까 봐 그랬다.”고! 권투 시합 이후 돈은 롤라의 바람대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롤라와 친구가 된다.
5. 니꼴라: 노쓰햄튼에서 태어나 찰리와 같은 동네에서 성장했다. 니꼴라의 꿈은 도시로 가서 성공하는 것! 약혼자인 찰리가 그녀와 같은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찰리와의 결혼을 포기한다. 젊은 나이에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쉽지 않은데...... 아주 당차다. 찰리와 헤어지고 자신의 꿈을 좇는다. (내가 산골 마을 출신으로 항상 도시에서의 삶을 동경해왔었기 때문에 니꼴라에 감정이입이 많이 되었었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을 빠져나왔을 때가 밤 11시! 아주 많이 늦은 시간이었지만 지하철 여섯 정거장만 가면 숙소가 있으니 발걸음이 느긋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숙소로 오는 길에 GS편의점에 들렀다. 오늘 밤과 내일 아침에 먹을 컵라면, 바나나, 요구르트 등을 구입했는데, 수호천사님이 좋아하는 그 맥주가 없어서 아쉬웠다.
한여름 밤, 잠들기 전 맥주 한 잔! 뭔가 그림이 완성되지 않는가? 뮤지컬을 감상한 후,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좋아하는 맥주를 한잔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 그 순간만큼은 내가 내 삶의 주인공! 체질적으로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 나도 오늘 같은 날은 맥주로 마무리해야 하는 날이라는 것을 알겠다. 그런데, 맥주가 없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하늘이 말갛다. 삼 일 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니 숙소에서 바로 집으로 가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예전부터 가 보고 싶었던 ‘<초소책방; 더 숲>에 가고 싶어졌다. 숙소는 성북구, <더 숲>은 종로구에 있다. 네이버지도로 검색해도, 카카오지도로 검색해도 숙소에서 40분은 가야 한다. 짐을 이고 지고 가야 하지만 비도 그쳤으니 가보자.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 타면서 카카오맵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내리기 전 알람 서비스해 준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네이버맵에서 카카오맵으로 갈아타기로 한다. 신문물에 눈을 뜨게 해 준 수호천사님 고마워요.

버스정류장에 내리니 ‘윤동주 문학관’이 보인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버려져 있던 청운 수도가압장(가압장: 수도 시설의 일부로, 수압을 높여서 고지대에 수돗물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함)과 물탱크가 ‘윤동주 문학관’으로 리모델링되면서 문학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윤동주(1917~1945)가 연희전문 학생이었을 때 문학관에서 멀지 않은 종로구 누상동에서 소설가 김 송(1909~1988)의 집에서 하숙을 했기 때문에 이곳에 문학관이 세워진 것 같다.
이때 룸메이트는 정병욱(1922~1982)이었다. 정병욱은 강제 징병으로 전쟁터에 끌려 나가면서 윤동주의 원고를 어머니께 맡겼고, 그의 어머니는 ‘소중한 원고이니 잘 보관해 달라’는 아들의 말을 따라, 집의 마루를 뜯고 원고를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민족말살정책을 펼쳤던 일제 치하에서 우리글로 써진 글을 목숨 걸고 지켰던 어머님 덕분에 윤동주의 시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정병욱에 의하면 그 둘은 종종 하숙집 근처의 인왕산에 올랐다고! 이 시기에 쓰인 시로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이 유명하다.
매시간 15분이 되면 윤동주에 대한 영상을 예전 물탱크실에서 볼 수 있다. 이날은 커다란 물탱크실에 수호천사님과 나 단둘이서 영상을 시청했다. 물탱크의 벽에 빔을 쏘아 나타나는 영상을 보는데, 감옥에서 생을 마친 시인 윤동주를 실감 나게 느낄 수 있도록 벽에 영상이 나타나도록 한 것 같다.

<윤동주 문학관>을 나와 목적지 <초소책방; 더 숲>으로 가는 길에서 조금 헤맸다. 그런데 길을 헤매는 동안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실물을 영접하는 귀한 경험을 했다. 그러고 보면 수호천사님이 지난 밤에 했던 말처럼 ‘나쁜 것이 다 나쁜 게 아니고, 좋은 것이 또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헤매지 않았다면 미술 교과서의 단골 손님인 인왕제색도의 바위를 직접 내 눈으로 보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예상 시간보다 조금 늦어졌지만 <초소책방; 더 숲>에 도착! 더운 여름날 30분을 넘게 걸어 도착한 오아시스! 아이스 디카페인 아메리카노가 있으면 마시려고 하였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다. 커피머신이 고장이 나서 커피가 아닌 다른 음료만 주문할 수 있단다. 그래서 펀치레모네이드 2잔과 뱅오쇼콜라, 크루아상, 소시지 빵 등을 시켜 2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야외 테라스로 가면 남산 타워를 보며 음료를 마실 수 있었지만, 그러기엔 날이 너무 더웠다.

간식도 먹고, 시원한 음료도 마셨다. 집에 돌아갈 때다. 시간을 보니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있다. 나는 광화문에서 광역버스를 타면 되고, 수호천사님도 광화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엠 버스를 타면 되니 광화문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한다.
그런데 <초소책방; 더 숲>에서 마을버스 타는 곳까지 또 길을 헤맨다. 나도 수호천사님도 길치에 방향치임을 제대로 인증하는 날이다. 하지만 여차여차 9번 버스 탑승하는 곳에 무사히 도착했고, 내려오는 길에 있던 수성동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도 좋았다. 정차된 버스에 오르자마자 에어컨이 들어오고, 기사님이 버스를 출발시킨다. 운이 좋았다.

1박 2일 서울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도착한 후, <윤동주 문학관>에서 가지고 온 엽서를 책상 앞에 두었다. 내가 여행에 미쳐있을 때는 수호천사님은 육아와 대학원 공부로 바빴다. 수호천사님이 여행을 다닐 때는 나에게 개인 사정이 생겼었다. 그래서 20여 년을 알아왔지만 수호천사님과의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행 후 잔잔히 남는 수호천사님과의 순간순간들, 그리고 그녀와 나눈 이야기들! 내가 나일 수 있었던 시간들!!! 이렇게 좋은 여행메이트였다니! 벌써 그녀와의 다음 여행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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